영화 우리들, 아이들의 세계에서 배제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미지
금 하나로 안과 밖이 갈리는 세계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6)은 피구로 시작해 피구로 끝난다. 편을 가르고,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금 하나를 두고 안에 남을지 밖으로 나갈지가 결정되는 놀이. 초등학교 4학년 선의 세계는 이 구조를 그대로 닮아 있다.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이유로 이 영화를 성장담의 범주에 넣는 것은 지나치게 안전한 독법이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어른 사회의 축소판이 아니라 그 원형에 가깝다. 예의와 제도와 사회적 언어라는 완충장치가 아직 씌워지지 않았기에, 배제와 결속의 메커니즘이 가장 벌거벗은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언제 우리가 되는가. 그리고 그 우리는 무엇을 대가로 성립하는가.  우리라는 말은 누구를 밖에 두어야 완성되는가? 결속의 조건은 공동의 배제 대상이다  보라를 중심으로 한 무리는 특별히 잔인한 아이들이 아니다. 이들은 그저 집단이 유지되는 가장 흔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 르네 지라르는 공동체가 내부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한 사람을 지목해 밖으로 밀어내는 구조를 반복해 왔다고 보았다. 배제의 대상이 특정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밀어낼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지목된다는 것이 이 메커니즘의 핵심이다.   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영화는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설명이다. 이유가 있어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배제가 먼저 있고 이유는 나중에 만들어진다. 한 무리가 하나로 묶이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를 바깥에 세워야 한다면, 그 자리에 누가 서게 되는지는 거의 우연에 가깝다. 후반부에서 그 자리가 다른 아이에게 옮겨 가는 장면은 이 구조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  나눈 비밀은 언젠가 급소가 된다  두 아이가 그토록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형편이 넉넉지 않은 집에서...

영화 벌새, 무너지던 1994년과 열네 살의 응시

이미지
다리가 무너지기 전에도 세계는 기울고 있었다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2019)는 1994년 서울에 사는 중학생 은희의 한 해를 따라간다. 그해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사실 때문에 이 작품은 종종 시대극으로 소개되지만, 감독이 참사를 영화의 후반부에야 꺼내 놓는다는 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에 가깝다. 재난을 앞세우면 개인의 일상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붕괴의 규모가 화면을 장악하는 순간, 그 시대를 통과한 한 사람의 하루는 통계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벌새>는 순서를 뒤집는다. 열네 살의 사소한 하루들을 먼저 쌓아 올린 뒤, 그 위에 다리가 무너진다. 참사를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편집의 순서 하나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참사가 왜 일어났는가가 아니다. 무너지기 훨씬 전부터 이미 기울어 있던 세계 안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존재를 알아보는 시선이 한 사람을 세운다   딱하게 여기는 것과 마주 보는 것의 차이   은희를 둘러싼 어른들은 대체로 그를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다룬다. 성적으로, 순종의 정도로, 집안의 서열 안에서 값이 매겨진다. 한문학원 교사 영지만이 다른 방식으로 은희 앞에 선다. 위로하거나 귀여워하는 대신 질문을 건네고, 대답을 기다리고, 함부로 결론 내리지 않는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나와 그것, 나와 너의 관계로 구분했다. 앞의 관계에서 상대는 쓰임새로 환원되고, 뒤의 관계에서 비로소 온전한 존재로 마주 선다. 시몬 베유가 타인에게 온전히 기울이는 주의를 가장 드문 형태의 관대함이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지가 은희에게 준 것은 조언이나 보호가 아니라 이 주의였다.  사람을 세우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시선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조용히 증명한다. 은희가 통과하는 관계들은 대부분 ...

영화 소공녀: 자본주의적 소유를 넘어 존엄을 지키는 존재의 방식

이미지
현대 사회의 청년실업과 주거 불안 속에서 던지는 존엄의 질문  현대 사회에서 '집'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추위와 위협을 피하는 보금자리의 의미를 넘어선 지 오래다. 오늘날 주거 공간은 한 개인의 경제적 계급과 사회적 신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척도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 조건처럼 여겨진다.  끊임없이 치솟는 부동산 가격과 물가 상승, 청년 실업의 고착화라는 거대한 경제적 압박 속에서 현대인들은 주거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하나씩 유예하거나 포기하도록 강요받는다. 영화 <소공녀>(전고운 감독)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가 개인의 존엄성과 고유한 취향, 그리고 내면의 행복을 어떻게 위협하고 해체하는지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사회가 표준으로 제시하는 '정상성의 기준'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남들과 같은 형태의 집을 소유하거나 임대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과 일상을 희생하는 삶이 과연 정답인가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한다. 영화가 그려내는 현실적 고단함은 단순히 주인공 한 사람의 불행이나 개별적인 서사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에 예속된 채 매일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존엄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현대인 전체의 존재론적 불안과 결핍을 대변하는 거울과도 같다.   미소의 선택과 물질주의에 대한 철학적 저항   주인공 미소는 집값과 집세,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는 경제적 결핍 상황 앞에서 대다수의 현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선택을 내린다.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과 경제적 합리성에 따르면, 주거의 안정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이며 이를 위해 개인의 취향이나 사소한 행복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미소는 자신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위스키 한 잔, 고단한 하루를 견디게 하는 담배 한 개피,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집'...